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군사상, 정치상으로 상당히 활약을 했지만, 오히려 어린 시절의 그를 소재로 한 민담이 더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학술적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볼까 합니다.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갈 즈음인 무술년(1598)에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이 있었다. 일전 명나라의 찬획 정응태가 양호(楊鎬)를 탄핵했을 때, 조선은 그를 변호하는 글을 올려 양호를 유임시켰는데, 이 일로 유감을 품은 정응태는 조선을 무함하는 상주를 올렸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정응태가 올렸다는 상주문의 일부가 남아있다.
“조선에서는 대대로 일본인이 사는 집을 지어놓고, 여러 섬의 왜노(倭奴)를 불러다가 전쟁을 일으켜서 중국을 침범하여, 요하(遼河)의 동쪽을 빼앗아 옛땅을 찾으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본인이 사는 집이란 일본 사신이나 상인들이 머무르는 왜관을 뜻하며, 옛땅이란 말은 원문에는 고토(古土)라 되어있다. 또 하나 문제가 된 것은 세종(世宗) 때의 신숙주(申叔舟)가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였다. 일본이나 기타 나라들의 사정과 풍습을 기록한 일종의 지리지였는데, 일본 사신을 접대한 내용 역시 문제가 되었다. 이같은 정응태의 상주문은 당시 중국 내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지만, 아무튼 조선으로서는 곤란한 지경에 놓였고, 이에 사정을 해명하고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이 때 사신으로는 처음 유성룡이 내정되었다가 파직되었고, 이항복이 대신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정구(李廷龜)와 황여일(黃汝一)이 동행했고, 정사(正使)는 이항복이었고, 부사(副使)는 이정구였다.
중차대한 임무를 띄고 중국으로 떠난 사신들이었지만 가는 데만 50여일, 돌아가는 일수도 그만큼 걸렸다. 교통이 불편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고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지루했을 것이다. < 무술조천록>에는 이때 사신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시들이 남아있다. 나라일을 걱정하기도 하고, 풍경을 적기도 하고, 여행의 흥취를 풀어보기도 했다. 북경에 도착했으나 상소문을 받아줄 데가 없어 발을 구르고, 몇 번이나 글을 올렸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추운 날씨에 길에서 마주친 각로를 붙들고 지금의 문제와 실상을 해명했던 일도 적혀있다. 이후 이항복은 같이 갔던 이정구와 황여일이 당대의 문장가였고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라고 회고했다. 그야 어떻든 이정구는 계속 시를 지어내고 이항복에게 자꾸 답시를 지어달라고 조른 모양이다. 이것은 두 사람이 지은 시의 숫자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 이항복이 이정복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지은 시에도 나타난다.
만리를 가는 데는 병이 많으니 / 萬里行多病
치료해도 백 가지가 마땅치 않네 / 醫治百不宜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니 / 安心有上藥
가만히 앉아서 시도 읊지 마시오 / 靜坐廢吟詩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白沙集)》 별집 五上-6에 실려있는 시로, 그 해 12월 중순쯤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시라고 하기보다는 잔소리에 가깝고, 그만큼 직설적이다. 맨 마지막 구절은 주체가 이항복인지, 아니면 이정구인지에 따라 시를 읊지 않겠다는 건지, 읊지 말라는 것인지로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 하지만 이정구의 문집 《월사집(月沙集)》에서 이정구가 앞의 이항복이 지은 시에 차운(次韻)해서 세 편이나 시를 지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정구에게 지었던 시 같다.
시 가운데 고요함이 있는데 / 自有詩中靜
어찌하여 시 안에서 조용히 쉬라 합니까. / 寧休靜裏詩
이 시는 이정구가 이항복의 시에서 차운해서 지은 세 구의 시 중 하나의 마지막 부분이다. 생략된 앞의 구절에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투를 살짝 내비치긴 했지만, 그래서는 시선(詩仙=李白)의 경지에 언제 이르겠느냐는 말도 했으니 결국 항변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서로 간에 있었던 섭섭함을 말이 아닌 시로 풀어냈다는 것이 옛날 사람다운 운치가 있달까, 나름대로 재미있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 것인지, 그 달 말 이정구가 정말로 병에 걸렸다. 너무 아파서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차대한 나라일로 중국에 가던 길이니 멈춰서 쉴 수도 없었다. 결국 사신 일행들은 병자를 이부자리로 칭칭 감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은 채 북경으로의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런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이항복이 아니었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머리는 흔들흔들 / 齒牙相戰更搖頭
수레가 가는데 배를 탄 것 같구나. / 强道乘車穩似舟
길에 가득한 사람들이 그 안에 사람이 있는 줄 어찌 알까? / 滿路豈知人在內
아이들은 똥밭의 소라고 다투며 우기는 구나. / 兒童爭訝糞田牛
이 시는 《백사집》이 아닌 《월사집》2권 10-11에 실려있는데, 12월 31일에 지어졌다. 당시 이정구는 아마 지독한 감기 아니면 몸살에 걸렸던 모양이다. 열이 펄펄 끓어올랐으니 덜덜 떤 것이고, 추운 바람 막아보겠다고 이부자리로 둘둘 감쌌는데 배 모양이 될 정도로 두텁게 감았던 것 같다. 아마 요즘 사람이었다면 미라(mummy) 같다고 표현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저런 꾸러미 안에 사람이 있는지 어떤 지 알아볼 수도 없고, 지나가는 아이들은 두엄밭에서 구른 소가 끄는 수레에 어떻게 사람이 있겠느냐고 우긴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앓고있는 이정구를 놀리는 시이다. 한편 이 시에 차운해서 이정구가 지은 시 역시 《월사집》에 전하는데, 이를테면 자기 변명을 위한 시였다.
수레 위에 여행짐 속에 얼굴을 푹 파묻고 / 車上行窩深沒頭
털옷을 끌어안고 든든히 앉았으니 배를 탄 것 같다. / 擁裘堅坐穩如舟
북경에 다다라 관문의 관리가 묻는다면 / 紫氣若逢關令問
푸른 소가 끄는 수레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리라. / 爲言人有駕靑牛
이처럼 고생도 하고 일도 많았던 사행길이었지만, 결국 정응태는 벼슬이 삭직되는 처벌을 받고 조선의 혐의는 풀리게 됨으로서 임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돌아갈 채비를 하던 다음해 3월 즈음, 이항복은 이정구에게 자신이 직접 쓴 이백(李白)의 시 묶음집을 선물로 주었다. 사과 겸 감사의 의미가 있었으리라. 이 선물에 이정구가 기뻐하며 지은 굉장히 긴 시가 《월사집》에 실려 있다.
안녕하십니까? 유나씨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가 진진합니다. 재미있는 스토리만가 아니라, 매우 유익한 공부도 되었습니다. 요즘 임진왜란의 문학적 형상화에대해 재료를 많이 읽어야 되는 제게, 이런 기사가 너무나 귀중합니다. 고맙습니다!